칠장사 가는 길에 pp******2018.10.19

칠장사 가는 길에

벌써 설악산에는 첫눈이 내리고 얼음도 얼었단다. 더웠던 올 여름만큼 추위도 더 심할 거라는 반갑지 않은 기사를 보면서 불현 듯 칠장사에서 만났던 까무잡잡한 어느 소녀가 떠올랐다. 불자는 아니지만 때마침 부처님 오신 날에 마땅히 갈 곳도 없는데다 안성에서는 오래되고 큰 고찰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웰빙 식이라는 절밥을 먹어 본적이 있느냐?’는 친구의 꼬드김에 확실하게 구미가 당겼다고나 할까. 기다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절 입구도 아직 까마득한데 주차공간이 없다. 겨우 차를 대고 걷는 길도 보통이 아니다. 자비로운 부처님께서 마치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는 양, 걷는 것이 아니라 떠밀리다시피 간신히 올라간 목적지에서 우리는 다시 줄을 서야했다. 어쩌면 기다림도 작은 시주가 아닌가 싶다. 젊은 연인에서 어르신은 물론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까지 참으로 많은 인파가 나를 놀라게 했다.
‘다음엔 다시 오나보라’던 속 좁은 내 생각이, 비빔밥과 국 한 그릇, 그리고 방울토마토와 떡 한 조각 때문에 눈 녹듯 잊어버렸다.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난생 처음 먹어 본 절밥이 뭐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맛있게 먹었고 천여 그릇을 준비했다는 스님과 보살님들의 정성이 마냥 고마울 뿐이다. 차까지 얻어먹고서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한 결 같이 평화롭고 행복할 줄이야.
일곱 명의 장사와 암행어사 박문수의 이야기까지 많은 사연을 담고서 내려오는 길에, 길가 나무그늘 밑에서 두 손을 꼭 잡고 표정 없이 앉아있던 어느 할아버지와 예닐곱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내 눈길을 끌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이 좋은 날에 왜 둘만 왔을까? 손녀일까 외손녀일까?
행여 할아버지와 손녀만의 조손가정일까? 궁금증이 자꾸만 꼬리를 무는 시간에 갑자기 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공휴일인 오늘에도 부모님은 모두 일을 가신 걸까? 아니면?
‘아닐 거야. 이 근처에 사시는 어르신이 손녀를 데리고 절 구경을 오셨겠지.’
마음만은 생각을 부정하는데 언젠가 보았던 ‘조손가정’의 안쓰럽던 특집방송이 왜 자꾸만 생각이 날까.
행복의 계단은 미끄러지기 쉽다지만 칠장사에서 내가 만난 할아버지와 그 어린 손녀만은 절대로 넘어지지 말고 내년엔 할아버지랑, 엄마랑, 아빠랑 오늘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마냥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진다.